등금뱅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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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재래시장 홍천오일장 그 장터이야기 강원도 재래장 홍천오일장 장터이야기 재래시장은 조상때부터 대대로 전해내려온 삶의 터전으로 지역사람들의 삶의 냄새가 배어나는 곳이다. 삶의 기본 구조인 경제적 생산과 소비를 담당하는 공간인 재래시장은 우리들에게 물질적 만족뿐 아니라 정신적 양식도 함께 제공한다. 재래시장의 다양한 상점 형태와 상품의 모습은 우리들의 먹을거리와 입을거리를 눈으로 보여주면서 삶의 행복 또한 보여주는 곳이다.홍천에서 열리는 장은 흡이 많이 나오는 홍천장, 옥수수, 홉, 잣, 약초가 유통되는 도관장. 보리, 잎담배, 인삼, 잣, 송이버섯이 판매되고 홉도 많이 나오는 좌운장, 보리. 옥수수. 영지. 인삼등이 주산물인 풍양장 등이다. 홍천에는 원효대사가 세운 수타사가 있다. '참 옥수수축제' '인삼축제' '천강 낚시축제'가 매년 열리.. 더보기
세계인의 재래시장 중국 이우시장을 가다 세계최대의 잡화상품 도매시장 중국 이우시장 1982년에 형성된 이우시장(義鳥, Yiwu Market)의 공식명칭은 국제상무성, 푸텐시장이다. 이 이우시장은 '20년 발전 전략'에 의해 현대식 건물로 탈바꿈한 특화시장이다. 연면적 260만 평에 4층 건물 7개동(A~G)과 중국 소상품성, 땡처리 시장, 장춘 자동차용품 시장이 들어서 있으며, 세계 최대 소상품 도매시장으로 유명하다. 이우에 없는 것은 세상에 없다고 하는 이우시장에는 58,000여개의 상점이 있으며, 무려 20여만의 사람들이 종사하고 있다. 또 하루 평균 32만여 가지의 상품 3,000만 톤정도가 거래되고 30~40만 명의 중국인과 100여개국 1만여 명의 외국인이 찾는 곳이다. 특히 이우시장의 대표적인 경쟁력있는 아이템은 악세서리 시장이라 .. 더보기
한국 재래시장 가축시장의 변천사 한국인의 재래장 가축시장의 변천 우리나라의 재래시장 중 생활용품을 파는 시장이 대부분이었지만 장날이면 또한 빼놓을 수 없었던 곳이 바로 가축들을 사고 파는 가축시장이었다. 우시장의 규모가 크고 작으냐에 따라 재래장터의 규모가 좌우될 정도였기에, 우리 한국인의 재래시장에서 가축시장의 변천은 중요한 한 부분이었던 것이다. 가축시장은 조선시대부터 전통적으로 일반 정기시장과 똑같이 개설, 운영되어왔다. 1914년 일제에 의하여 발포된 시장규칙에서도 모든 재래시장 중에 농산물과 각종의 생활용품을 거래하는 정기시장을 보통시장이라 하였고 약령시, 가축시장, 신탄시장(薪炭市場, 땔감시장)등은 특수시장으로 구분하였던 것이다. 그러다가 1954년 1월 23일 가축보호법이 제정 공포됨에 따라 가축시장은 모든 일반 시장들보다.. 더보기
세계인의 재래시장 중국 판자위엔 골동품시장 가보기 중국의 인사동골목 판자위엔 골동품시장판자위엔 골동품 시장(Panjiayuan Flea Market)은 베이징 삼환 동남쪽에 위치한 중국 최대의 골동품 시장이다. 1994년 설립된 이후 지금까지 20여년 동안 중국 및 주변국가, 소수민족들의 고대 예술품들이 이곳으로 많이 들어오고 있다. 판자위엔은 1997년 7월 4만 8500평방미터의 부지에 거대한 상설시장으로 변모했다. 3000여개의 점포들로 이루어졌으며 고서, 서화, 도자기, 가구, 불상, 장신구, 식기, 목공예품 등이 거래되고 있으며 전세계의 골동품 수집 애호가들이 눈여겨 보는 곳이다 꼭 무엇인가를 사지 않아도 구경만 하면서 다니더라도 충분한 가치가 있는 곳으로, 아침 일찍부터 노점들이 들어서며 오후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붐비기에 오전에 방문하여 구경.. 더보기
한국인의 재래장 일제시대와 해방이후 역사편 일제시대의 시장과 해방이후 한국의 전래시장의 변화일제가 1901년 한국을 병합. 강점하자마자 총독부에서는 한국의 모든 시장에 대해 도지사의 허가없이는 새로 시장을 설치(新設)하거나 기존의 시장을 변경할 수 없도록 묶어 놓은 다음 1914년 시장 규칙을 제정 발표하였다. 이러한 과정을 밟아 한국의 모든 시장은 일제의 손아귀에 그야말로 완전히 들어가게 되었고 장악되었다. 일제에 의해 분류된 한국의 시장 종류는 다음과 같이 구분되었는데 살펴보면 이러하다. 재래(在來)시장, 공설(公設)시장, 어채(魚菜)시장 및 중앙도매시장, 곡물과 유가증권 및 현물거래소(1931년에 폐지)였다. 그리고 일제는 한국 전래의 전통시장을 재래시장(在來市場)이라고 불렀고 기타의 시장을 신식시장(新式市場)이라고 불렀다. 이렇게 일제는 .. 더보기
한국인의 재래장 횡성오일장 장터이야기 우하하 횡성한우오일장 그 장터이야기며칠전 내린 눈으로 인해 차창밖의 산야는 하얀 설색으로 그려진 설경이 펼쳐져 있다. 한폭의 산수화라고 하기에 딱 알맞은 풍경이다. 우리나라의 금수강산은 지금은 빛이 바랬지만 그래도 강원도의 이 산하는 세계 어느나라보다 아름다운 그림같은 풍경을 간직하고 있다. 횡성오일장을 찾아가는 마음은 이렇게 설경에 묻혀 기쁨의 눈을 뗄 줄을 모른다. 횡성오일장의 장터는 과거 동대문 밖 가장 큰 시장으로 불렸던 장이다. 최고의 한우로 꼽히는 횡성한우로 인해 더 유명한 장터이다. 횡성은 수도권에서 볼때 강원도로 들어가는 길목에 자리하고 있어서 예부터 한양과 강원도 사이를 지나는 사람들과 물자의 왕래가 많았고, 일제 강점기 때에는 '동대문 밖 가장 큰 시장'이라는 별칭을 얻을 정도로 시장의.. 더보기
한국인의 재래장터 역사이야기 조선시대편 조선시대의 시장형성과 역사에 대한 이야기조선시대에는 현재의 시장에 대한 기능과 모습이 유사한 시장과 상업력이 등장했다. 에 의하면 조선조 태조 원년(1392)에 고려의 제도를 모방하여 경시서(京市署)를 설치하고 시장의 관리. 감독. 도량형기의 단속 및 물가의 억제 등에 관한 업무를 보게했다고 한다. 아울러 태조 3년(1394)에는 개경에서 한양으로 천도하면서 '좌묘우사(左廟右社) 전조후시(前朝後市)' (경복궁 중심으로 왼쪽에 종묘, 오른쪽에 사직단, 광화문 앞 남쪽 좌우로 의정부, 육조, 사헌부 등이 배치)되고 운종가 일대에 시전이 건설되었다. 한양의 시전 번영은 곧 상인의 우열을 가져오게 하여 자연히 전(廛)의 경제적, 사회적 위치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특히 국역 부담의 고액전 여섯개를 추려서 육의전이.. 더보기
한국인의 재래장 여주오일장 장터이야기 세종대왕의 여주 오일장 그 장터이야기​ 찬바람이 가시고 모처럼 온화한 기운이 감도는 날이다. 내일은 다시 차가운 대륙성 기압으로 기온이 뚝 떨어진다고 예보가 말해준다. 평일 금요일이지만 여주 오일장이 열리는 날이라 따뜻한 날에 갔다오기로 마음을 먹고 배낭을 메고 길을 나선다. 우리의 수도권 교통망은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뒤지지 않을 것이다. 카드 하나로 경기도 여주까지 갈 수 있다니, 내가 이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 그저 고마울 뿐이다. 여주역에서 버스로 몇 정거장 되지 않지만 벌써 많은 사람들이 줄지어 서 있다. 대부분 나이드신 분들이다. 장날이라 장터의 옛 맛을 즐기러 오신 분들이 아니겠는가. 세종대왕릉이 있는 여주인지라 모든게 한글로 통하고 있다. 거리 이름을 비롯 사방곳곳이 한글이 들어간 명칭이다..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