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의 재래장터 역사이야기 조선시대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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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의 시장, 전통오일장, 전통시장특산물, 재래시장의 맛과추억

한국인의 재래장터 역사이야기 조선시대편

조선시대의 시장형성과 역사에 대한 이야기

조선시대에는 현재의 시장에 대한 기능과 모습이 유사한 시장과 상업력이 등장했다. <증보문헌비고>에 의하면 조선조  태조 원년(1392)에 고려의 제도를 모방하여 경시서(京市署)를 설치하고 시장의 관리. 감독. 도량형기의 단속 및 물가의 억제 등에 관한 업무를 보게했다고 한다. 아울러 태조 3년(1394)에는 개경에서 한양으로 천도하면서 '좌묘우사(左廟右社) 전조후시(前朝後市)' (경복궁 중심으로 왼쪽에 종묘, 오른쪽에 사직단, 광화문 앞 남쪽 좌우로 의정부, 육조, 사헌부 등이 배치)되고 운종가 일대에 시전이 건설되었다.

 한양의 시전 번영은 곧 상인의 우열을 가져오게 하여 자연히 전(廛)의 경제적, 사회적 위치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특히 국역 부담의 고액전 여섯개를 추려서 육의전이라 했는데 이는 조선시대 국역 부담을 하는 시전인 유분각전 중에서 최고액 유분전 6개 상전을 지칭하는 것이다. 관설시장, 즉 종로시장(鐘路市場)의 중심체는 육의전이었는데 이들의 독점적 상권장악으로 인해 특권적 독점가격이 형성되게 되었다. 이 틈을 이용해 무허가 상점인 난전이 발생하여 한양 성내의 물가 상승을 부채질하였다. 이로인해 시민들은 종로시장 이외의 곳에서 생활용품을 구하는 경향이 나타났으며, 이러한 경향과 시가(市街)의 확장 등에 힘입어 이현시장(베오개시장), 마포시장, 동대문시장, 칠패시장(남대문시장) 등 난전(亂廛)이 곳곳에서 발생하여 번성하게 되었다.

 지방의 시장에 관한 기록은 <조선왕조실록>에서 찾아볼 수 있다. 성종 1년(1470)에 전라도 주민들이 장문(場門)이라는 이름으로 한달에 두번 시장을 개설했다고 서술되어 있다. 경시(京市)라고 하는 것은 왕궁이 위치한 도읍지에 국가에서 개설한 관설시장을 말한다. 이에 대하여 향시(鄕市)라고 하는 것은 도읍지 이외의 전국 각 지방에서 백성들에 의해 자연발생적으로 형성된 지방시장을 말한다. 한양에서는 이미 조선조 초기에 시전이외에 장통장 등 여러곳에 일반물화와 미곡, 우마 등의 교역을 위한 장시가 열렸다.   

   조선시대의 지방시장은 순조 8년(1808)에 편찬된 <만기요람>에 의하면 약 1000여개가 있었다. 조선시대의 향시는 선조때에 이르러 그 수가 많아졌다. 1월 6장(一月六場)으로 한 지방에서 매달 6회 개시(開市)되면서 자연스럽게 하루 왕복거리인 30~40리(약 11.7 km~15.7 km)마다 장이 들어섰다. 이와함께 1.6일, 2.7일, 3.8일, 4.9일, 5.10일의 순서로 향시의 개시가 서로 겹치지 않게 5일 단위의 순회 방식으로 시장이 열렸다.                                             

   개항이후에 시전의 시련이 닥쳐왔는데 그것을 살펴보면은 개항이후 우리나라의 시장, 특히 한양(서울)의 시장은 시전은 물론 나름대로 자생력을 키워왔던 사설시장도 청나라와 일본 상인들에 의해 무차별적 상권 침탈을 당했고, 갑오개혁때 육의전의 금난전권이 폐지되면서 시전상인에 대한 국가의 보호막이 사라지기도 했다. 대한제국이 들어서자 시전 상인이 중심이 된 종로 상인들은 새로운 특권을 정부에 요구했고 , 정부는 이들에게 관용물품 조달권 등 몇 가지 특권을 부여했다.   반면, 전통적으로 시전 상인과 대립하면서 성장해온 칠패(七牌)(조선시대 서울시내에 성장해온 난전시장으로 지금의 서소문 밖에 있었다) 는 이미 18세기 전반에 이현, 종가(종로)와 함께 서울의 가장 큰 상업 중심지로 발전했다.                                                                                                              

 시장은 새로운 외국 상인과 자본의 침투에 대해 정부의 보호조차 받지 못한채 맞서야만 했다. 특히 일본 상인은 임대로라도 칠패시장의 진출을 시도했는데, 칠패상인은 집단적으로 일본 등 외국 상인의 진출을 막기위해 노력을 했다. 이때 새로이 수표교 등지에 중국인들의 청시(淸市)가 생겼으며 일본 상인들도 남산과 진고개 등지에 상점을 차렸다. 1905년 이후에는 일본인들이 서울역 맞은 편과 용산 등지에 수산시장을 설립하고 한양의 생선 시장을 잠식했다.                                  

이렇게 조선의 개국에서부터 대한제국과 일본의 강제점령시 까지의 시장 발전에 대해 간략하게 그 역사의 흐름에 대해 서술해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