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의 재래장터 역사 고려시대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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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의 시장, 전통오일장, 전통시장특산물, 재래시장의 맛과추억

한국인의 재래장터 역사 고려시대편

고려시대의 시장에 관한 이야기

* 고려시대 관영시전이 등장한 시대

 고려 태조 왕건은 송도에 도읍을 정하면서 수도 건립의 3대 요건으로 "시전을 설치하고 궁궐을 창건하며 행정구역을 편제해야 한다" 라고 하면서 태조 2년(919)에 상설시전을 세웠다. 이렇듯 국가체제가 정비되고 불교가 융성해지면서 사원경제가 발달한 고려시대에는 모습을 갖춘 시장이 등장했다. 특히 공장세를 내면서 수공업 생산을 담당하는 관영(官營)과 사영(私營)이 행정 중심지에서 활성화 되면서 잉여생산물 등을 소비하는 공간으로 시장이 정착되었다. 고려시대의 시장은 수도인 개경의 시전을 중심으로 한 도시의 시장과 지방의 장시로 구분할 수 있다.

 고려시대 주요시장 경제정책으로는 화폐정책과 상업 진흥정책 그리고 물가정책을 들 수가 있다. 화폐정책으로는 제6대 성종 15년(996)에 처음으로 철전을 주조하여 그 사용을 장려하였다. 약재(藥材)의 거래와 차(茶) 그리고 술과 밥을 파는 가게에서는 반드시 화폐를 사용하도록 하였다.     상업 진흥정책의 예로는 숙종 7년(1102)에 시장장려관 2인을 두고 매일 시장을 감독하고 독려하도록 하였다. 또한 물가정책의 예로는 제8대 현종 5년(1014)에 물가가 폭등하여 추포 1필에 쌀 8말까지 오르니 삼사(三司)는 조정에 건의하여 물가를 바로잡았다고 한다. 특히 고려시대에도 매점매석으로 폭리를 노리는 악덕 상인들의 횡포가 있었다.

 고려시대 가장 큰 규모의 시장은 국가에서 설치한 개성의 관설시전으로, 외국사신의 왕래가 있을때면 열리는 대시(大市)가 되었다. 시전에서는 주로 포목이 주된 화폐로 사용되었던 것이다. 관설시전이었던 고려의 경시전은 대시를 계기로 더욱 번창하여 희종 4년(1208)에는 시전의 중추를 이룬 좌우 양측의 장상 1008영과 기타 대창고와 73영의 방옥(坊屋) 등 장대한 규모로 확장되었다.  고려 개경의 시전에는 보호. 감독기관으로서 경시서(京市署)를 설치하여 시사의 물가조절과 시정감독을 담당하게 하였다. 아울러 개경에는 시전외에도 일정한 장소에서 열리는 노상(路上)시장도 있었는데, 이것이 오늘날에도 노점의 모습으로 남아있는 것이다.

 고려시대에는 수공업이 자못 발달하였는데, 전문적 수공업으로서 예를들면 피갑장(갑옷을 만드는  수공업), 각궁장(각궁을 만드는 수공업), 전장(화살을 만드는 수공업) 등과 같은 공장(工匠)이 매우 다양하게 분화되었다. 그리하여 장인들의 일부는 관공서에 예속되어 관수물자(官需物資) 생산에 종사하는가 하면 나머지 장인들은 각 소마다 형성되어 있는 공장무리의 특수 부락에서 생산에 종사했던 것이다.

 고려시대에는 수도인 개경을 포함한 삼경(개경, 남경, 서경)을 중심으로 상업과 무역이 발달했다. 삼경외에 지방에서는 일주일 단위로 시장이 열렸는데, 이것이 주시(週市)였다. 하루만에 왕복이 가능했던 성읍시와 교통의 요충지인 지방에선 향시가 열리기도 하였다. 향시는 정오부터 오후 2~3시경에 열렸고, 향시의 감독은 각 주현(州縣)의 호장(戶長)이 관장했다. 호장은 각 지방시의 장날을 정하고 도량형을 규제하여 시장세를 징수하는 등 시장의 모든 일을 관장하였던 것이다.

고려시대의 시장 발달에 대해서도 참고적인 사항만 간략하게나마 나타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