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시대의 시장에 관한 이야기
삼국시대에 이르면 삼한시대보다 제법 시장의 모습을 갖췄다는 기록이 있다. 고구려의 경우 미천왕 20년(319)에 "관부와 저잣거리가 예전처럼 안도하였다."라는 기록과 6세기 중엽 평강공주가 온달에게 "시장 사람들의 말은 사지말라"고 한 것으로 보아 제법 큰 시장에서 거래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저잣거리는 가게가 죽 늘어서 있는 길거리를 지칭하며, 가방(街坊), 시가(市街), 시항(市巷)으로도 불린다. <한국어 대사전,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2009년>
백제는 수도인 웅진성에 관설 시장을 개설하고 도시부(都市部)라는 시장 감독청을 두어 시장의 개폐, 상거래 질서, 분쟁조정, 불법 거래들을 단속하고 세금을 징수하였다. 또한 지방 시장이 있고 지방 시장을 순회하면서 장사를 하던 행상(行商)이 있었다는 자료로서는 정읍사를 빼놓을 수 없다. 행상을 나간 남편의 밤길을 염려하는 아내의 애절한 마음을 노래한 작가 미상의 백제가요 <정읍사>에 "져재 녀러신고요(시장에 가 계신가요)" 하는 표현이 나온다. 여기서 져재는 시장을 나타내는 말로 백제에도 시장이 형성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밖에 삼근왕 2년(478)에 반란을 일으킨 연신의 처자를 '웅진저자'에서 목을 베었다는 기록이 <삼국사기>와 <백제 본기>에 나온다. 그리고 의자왕 20년(660)에 사비의 시장사람들이 달아나다가 넘어져 죽은자가 100여 명이었다는 기록<삼국사기> 등을 보면 백제에도 큰 규모의 시장이 형성되어 있었음을 짐작할 수가 있다.
신라에서는 국가에서 시장을 개설하여 감독관까지 두고 운영하는 경시(京市)가 있었다. 신라는 수도 경주에 설치된 시전인 경시와 지방에서 열린 향시등 국가에서 시장을 세우고 제도적으로 운영한 기록이 있다. 소지왕 12년(490)에 경주에 경시(京市), 지증왕 10년(509)에는 동시(東市) 그리고 효소왕 4년(695)에는 서시(西市)와 남시(南市)를 설치하고, 서남양시전(西南兩市典)을 두어 시장 감독을 맡게 했다. 또한 진평왕 50년(628) 여름에 가뭄이 크게 들자 시장을 옮기고 용을 그려 비 내리기를 기원했다는 기록도 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고구려는 시장에 관한 문헌이 발견되지 않고 있기때문에 당시 어떠한 형태의 시장을 통해 물자가 유통되었는지는 알길이 없다. 그러나 고구려에는 전국적으로 164개의 주(州), 군, 현이 있었는바 이들 행정구역의 소재지에는 생활 물자를 위한 각종 시장이 있었을 것임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고 할 수 있다. 정확한 문헌이 없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이렇게 우리 역사속 삼국시대의 시장형성에 대한 부분을 간략하게 더듬어 살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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