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의시장 남대문시장, 동대문시장, 광장시장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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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의 시장, 전통오일장, 전통시장특산물, 재래시장의 맛과추억

한국인의시장 남대문시장, 동대문시장, 광장시장의 역사

남대문시장, 동대문시장, 광장시장의 변천 역사

 우리나라에 무수히 많은 재래시장, 즉 전통시장들이 있지만 그중에서도 남대문시장과 동대문시장 그리고 광장시장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시장이라 할 수가 있다. 우리나라 상인들의 굴곡과 애환들을 짊어지면서 흘러온 숱한 세월들. 그러나 우리들은 그냥 시장에 물건을 사러가고 구경을 하며 즐거운 시간들을 보내지만, 어떻게 이 시장들이 흘러왔는지 알 수도 없고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그게 현실이다. 그렇지만 시장의 역사에 대해 조금이라도 알 수 있으면 더 자주 시장을 찾으면서 즐거운 시간들을 보낼 수도 있지 않을까 싶다. 이제는 역사의 전통을 지닌 이 시장들이 우리 한국을 넘어 세계의 많은 관광객들이 찾는 글로벌 시장이 되었기에 조금이라도 이야기를 들려준다면 더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오늘의 남대문시장은 대한제국때 추진된 일련의 개혁 사업으로 서울의 주요 간선도로가 정비 확장될 때 칠패, 이현시장의 재정비와 이전과 함께 등장하기 시작했다. 정부에서는 선혜청, 동대청에 이어진 곳간과 마당을 시장터로 제공하면서 그에 소요되는 건설비를 그 당시의 돈 2,196원(元)을 지출하여 남대문로 일대와 시장(상점가)을 정비하였다. 당시 선혜청 안으로 시장을 옮긴 것은 이후 다른 곳으로 이전시키기 위한 임시 조치로 하였던 것이었다. 그렇지만 이후에도 그 자리에서 시장이 계속 유지되어 활성화되는 탓에 오늘날의 남대문시장으로 이어져 왔던 것이다. 그당시 선혜청 안의 시장은 한성부 서서(西署). 양생방(養生坊), 창동(倉洞)에 속했으며, 현재 중구 남창동 남대문시장 일대이다.

동대문시장의 등장도 역시 칠패시장의 변화로 남대문시장이 등장한 것과 맥을 같이 한다고 볼 수 있다. 당시의 칠패시장은 전통적으로 대한제국이 들어서서 시전상인이 중심이 된 종로상인과 구분되는 상인들이었다. 조선시대 서울시내에 있던 난전시장으로 지금의 서소문 밖에 있던 시장이었다. 그 동대문시장의 모체가 되는 이현시장 또한 남대문시장이 그러하듯 종로거리가 정비되고, 서대문에서 청량리를 거쳐 동대문에 이르는 전차가 개통되면서 거래되는 장소의 영향을 받았던 것이다. 이현시장은 18세기 전반에 형성된 종로4가 부근의 서울의 시장으로 이미 가장 큰 상업 중심지로 발전하였었다.

또한 이현시장은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제가 1905년 실시한 화폐 정리사업(화폐개혁)으로 막대한 피해를 입었으며, 이에 조직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1905년 7월에 이현시장 상인들을 중심으로 당시의 자본금 12만원(300만냥)으로 광장주식회사를 설립했다.

당시 광장주식회사는 오늘날 종로구 예지동 4번지에 설립되면서 시장 이름이 동대문시장으로 불렸다는 기록이 1905년 일본인이 조사 정리한 자료에도 등장한다. 이후 동대문시장은 광장주식회사의 주주들이 운영. 관리했고, 거래 품목별로 상인조합을 결성하도록 했으며 일제 강점기에도 광장주식회사가 경영권을 행사하며 조선인 시장으로서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다. 오늘날에는 패션문화를 선도하는 동대문시장과 전통을 지닌채 많은 사람들이 즐겨 찾고 있는 광장시장의 변천사에 대해 남대문시장과 같이 간략하게나마 훑어 보았다.